CKIPM Marine Group


News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소통을 제안하는 워터프론트 전문 기업 CKIPM의 다양한 소식을 알립니다.

마리나 디자이너 Keith Lawrie 인터뷰 (요팅매거진 2008년 7월호)

작성일 08-07-04 18:46 | 조회 22,423 | 댓글 0

본문

0694fb7d48e3ae4e6ca91357d44fb4a5_1533375987_35.jpg
“향후 10년간 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는걸요”
호주 ‘마리나의 아버지’, 씨케이마린 키스 로리 이사

“내 나이가 몇인 줄 알아요?”라고 묻더니 자랑스럽게 “일흔일곱이에요”라며 웃는다. 어떻게 아직도 일을 하고 있냐며 놀라는 기자에게 돌아온 한 문장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 칼럼의 제목으로 결정했다. 그야말로 마음을 ‘탁’ 치던 그 열정에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졌으므로. 에디터 김영리 기자 / 사진 박진희 기자

질문을 할 틈이 별로 없었다. 젊은이를 만나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모습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우리네 할아버지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쏟아 놓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 사람 참 대단하다 싶다. 마리나 건설에 대한 열정과 세심함에 따뜻함과 순수함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씨케이마린과 손을 잡고 한국 마리나 건설에 몰두하고 있는 키스 로리 이사는 ‘로마(Lawmar)’ 라는 호주의 유명한 마리나 컨설팅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는 마리나 디자이너이다. 키스 씨가 마리나 건설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건설업을 하던 그가, 자신이 살고 있던 호주 퀸즈랜드에서 첫 요트를 산 후 개인이 쓸 수 있는 마리나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호주 전역을 돌아보았는데, 단 2개의 마리나 만을 발견했어요.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갔고 리서치를 진행했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도 많이 받았죠.” 4개월 후 호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마리나 건설에 착수했다. 4년간에 걸친 공사를 끝내고 나니, 마리나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더란다. 그 유명세를 바탕으로 그는 호주의 수많은 마리나를 설계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나를 ‘마리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더군요.” 화려한 수식어와 명예, 그리고 부를 얻었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호주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 그렇게 그는 일본,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세계 곳곳의 마리나를 설계하기 시작했고, 현재 그렇게 그가 디자인한 마리나가 60여 개에 이른다. 그러다가 3년 전, 씨케이마린의 강석주 대표를 만나 요트 산업에 있어 황무지와도 같은 한국에 열정을 쏟기로 결정했다. 그때부터 그는 일 년의 반을 한국에서 지내며 마리나 건설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그가 마리나를 디자인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입장이 아니라 사용자의 입장이다. “퀸즈랜드에 있는 그레이트 샌디 스트레이츠 마리나를 지으면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했어요. 배에서 내리는 승객들이 짐을 편하게 옮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죠.” 이런 작은 마음 씀씀이가 모여 그에게 ‘마리나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것일까. ‘호주에서 이미 굉장한 재력가인데, 이 연세에 한국이라는 땅에 와서 일을 하는 것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 산업을 개척한다는 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라는 한 직원의 귀띔에 그의 열정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한국에 올 때 드는 비행기 삯이나 숙박료를 개인의 돈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한국에서 마리나 디자인을 하면서 그가 현재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어선이다. “호주도 그렇지만, 어선이 많은 한국의 특성상 어선과 커머셜 보트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피셔리나 같은 마리나를 건설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항구를 방문할 때면 어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자꾸만 말을 거는 키스 씨 때문에 함께 다니는 직원들이 고생할 정도라고. 이런 그의 노력이 인정을 받아 얼마 전에는 국회 문광위원회로부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수 십년의 시간 동안 세계 곳곳의 마리나를 디자인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없냐고 물었다. 거창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의외로 아주 사소한 이야기가 돌아왔다. “일본에서 통역을 해 주던 한 호주 사람이 나를 ‘마리나의 이모’라고 소개하더군요.” 그리곤 한참을 웃는다. 순수한 그의 대답에 반해 “10년이 아니라 20년은 더 일을 하셔야겠어요”라고 말을 건넸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실로 그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